네로 황제, 로마의 황혼을 부른 자

안녕하세요, 여러분! 리모스토리입니다. 오늘은 네로 황제가 6월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입니다. 폭군 네로라고 흔히 알려진 네로 황제는 어떤 인생을 살아갔을까요? 함께 알아봐요.

혼란 속에서 태어난 아이

기원후 37년 12월 15일, 로마의 항구 도시 안티움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어요. 그의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였고, 훗날 그는 로마 제국의 다섯 번째 황제로 등극하게 되며 ‘네로’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게 돼요. 그의 아버지 도미티우스는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방탕한 생활로 평판이 나빴고,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칼리굴라 황제의 여동생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녀였어요. 다시 말해, 네로는 로마의 최고 권력층과 혈연적으로 깊이 연결된 인물이었고, 이 혈통이 훗날 황제 자리에 오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돼요.

혼란 속에서 자라난 어린 시절

네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사망했고,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권력 다툼 속에서 추방당했어요. 어린 네로는 외가에서 자라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환경에 노출됐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야망은 어린 아들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려는 방향으로 강하게 작용했어요. 칼리굴라 황제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르자, 아그리피나는 복권되며 재혼을 시도했어요. 그녀는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면서 네로를 황제의 양자로 들이게 돼요. 이 과정은 단순한 가정사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권력 지형을 뒤흔드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었어요.

황제의 길로 들어서다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된 이후,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지목돼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있었지만, 아그리피나는 브리타니쿠스를 배제하고 네로에게 권력을 몰아주기 위해 여러 계략을 벌였어요. 결국 기원후 54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네로는 약관 17세의 나이로 로마 황제에 오르게 돼요.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에는 아그리피나가 독살을 지시했다는 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그 그림자는 네로의 즉위에도 그대로 드리워졌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네로는 철학자 세네카와 프레토리안의 사령관 부루스의 지도로 비교적 온건한 정치를 펼쳤고, 초반 5년간의 통치는 ‘네로의 황금기’로 불리기도 해요.

권력의 맛과 어머니의 그림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네로는 점차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간섭을 귀찮아했어요. 아그리피나는 황제의 어머니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려 했고, 이는 젊은 황제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건드렸어요. 네로는 점점 어머니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했고, 결국 그녀의 거처를 옮기게 하며 정치적 거리두기를 시도했어요. 그러던 중, 네로는 파페이아 사비나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정략결혼 상태였던 옥타비아 황후와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 이혼을 추진했어요.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이에 반대했고, 모자의 갈등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됐어요. 기원후 59년, 네로는 군인을 동원해 어머니를 살해하라고 명령했고, 이 끔찍한 살인은 당시 로마 사회에 큰 충격을 줬어요.

로마를 불태운 황제

네로의 폭정 중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은 바로 ‘로마 대화재’예요. 기원후 64년, 로마 시내 대부분을 태워버린 대화재가 발생했는데,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지르게 했다는 의혹이 당시부터 퍼졌어요. 화재가 나던 밤, 네로는 황궁에 없었고 불길이 번지는 가운데 리라를 연주하며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물론 후대의 과장일 수도 있지만, 네로가 도시 재건을 위해 의도적으로 화재를 유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그는 화재 이후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무자비한 박해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콜로세움에서 잔인한 처형을 당하게 돼요.

예술가를 꿈꾼 황제

네로는 로마의 전통적인 황제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어요. 그는 정치가보다는 예술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했고, 실제로 음악, 시, 연극, 경기 등에 깊은 애정을 보였어요. 그는 자신이 무대에 오르고,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어요. 황제 신분으로 공공연하게 극장에 서는 행동은 원로원과 귀족 계층에게 큰 모욕이었고, 점차 황제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어요. 네로는 로마를 떠나 그리스를 순방하며 공연에 참여했고, 자신이 수상한 상에 대해 극도로 자랑스러워했지만, 이는 제국의 통치자로서 맡아야 할 책임을 외면하는 행동으로 비춰졌어요.

암살과 반란, 그리고 고립

기원후 65년, 피소니우스 가문 중심의 반란 음모가 발각됐고, 이를 계기로 네로는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어요. 철학자 세네카도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고, 로마의 지식인과 귀족들은 점점 황제에게 등을 돌렸어요. 귀족뿐 아니라 군부 내에서도 네로의 독단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지방 총독들 사이에서 반란이 속출했어요. 68년, 갈리아 루구두넨시스 지방의 총독 율리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어 에스파냐의 총독 갈바도 제국의 적으로 나서게 됐어요. 결국 프레토리안 근위대마저 네로를 배신하고 갈바를 지지하게 되자, 네로는 완전히 고립되었어요.

최후의 순간과 자살

황제직에서 축출당한 네로는 황궁을 빠져나와 소수의 시종들과 함께 외곽의 한 자유민의 저택으로 몸을 숨겼어요. 그는 로마 원로원이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공포에 빠졌고,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직감했어요. 결국 기원후 68년 6월 9일, 네로는 스스로 목에 칼을 들이대며 자살을 선택해요. 죽기 직전 그는 “어떤 예술가가 죽는가!”(Qualis artifex pereo!)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해요. 그의 죽음은 로마 제국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고, 이후 로마는 1년간 네 황제가 교체되는 ‘4황제의 해’라는 정치적 대혼란에 빠지게 돼요.

어떤 예술가가 죽는가!
Qualis artifex pereo!

역사에 남겨진 이름, 네로

네로는 지금도 독재자와 폭군의 대명사로 불려요. 로마를 불태우고, 어머니와 아내를 죽이고, 예술에 빠져 제국을 방치했던 황제로 기억되고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고, 후대에는 그에 대해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요. 로마의 대화재를 직접 일으켰다는 증거는 명확하지 않으며,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원했던 지도자라는 긍정적 해석도 존재해요. 그러나 그의 통치는 결과적으로 로마의 안정과 전통 질서를 무너뜨렸고,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권력 남용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어요.

그럼, 지금까지 리모스토리였습니다!

rimo ma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리모스토리의 포스팅을 하고 있는 RIMO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고, 리모스토리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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